[공연 후기] 달콤한 시간, 씁쓸한 뒷맛 "라이" 내한 공연

[공연 후기] 달콤한 시간, 씁쓸한 뒷맛 “라이” 내한 공연

지난달 27일 오후 8시 인디밴드 라이(Rhye)가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예스 24 무브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유난히 여성 관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라이의 음악이 주류는 아닐지라도 여성 음악팬층에는 크게 어필하고 있음을 단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리였다.

라이는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프로듀싱을 담당하는 덴마크 출신의 로빈 한니발(Robin Hannibal)과 중성적인 음색이 특징인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마이크 밀로쉬(Mike Milosh)로 이루어진 듀오다. 같은 레이블을 통해서 서로를 알게 된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팀을 결성한다. 각각 덴마크와 캐나다에 살고 있어 만나기는 힘들었으나 한니발과 밀로쉬는 물리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꾸준히 작업을 공유하고 개선했다.

 

라이는 2012년 싱글 “Open”과 “The Fall”에 이어 2013년 첫 음반 <Woman>을 발매했다. 라이의 음악이 공개될 때마다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피치포크를 비롯한 여러 음악매체들은 <Woman>을 두고 입을 모아 ‘2013년의 앨범 중 하나’라며 극찬을 했다.

라이의 음악은 일렉트로닉, 록, 재즈, 알앤비, 디스코 등의 장르적 특징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과거 음악들이 가진 양식을 사용해 몽환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를 부여했고 과거 유행했던 소피스티 팝(Sophisti-pop)의 향수를 느끼게 했다. 보컬인 밀로쉬는 앨범 타이틀 <Woman>이 말해주듯 스스로 화자가 되어 여성적인 감수성과 애달픈 노랫말을 얹었다. 현악기와 관악기를 활용하는 방법 또한 단순히 복고를 재현하기 보다는 한층 더 고급스럽고 깊이 있는 서사를 전달하는 효과를 줬다. 이런 요소가 갖춰진 라이의 음악은 말 그대로 ‘핫’하고 ‘섹시’한 음악으로 전세계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신비주의를 벗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준 라이

공연 입장은 7시부터 진행됐다. 예스 24 무브홀 내부는 평소와는 다르게 은은한 조명과 풍선, 촛불 등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져 따뜻한 분위기 연출하고 있었다. 공연기획사 페이크버진은 사전에 공연장 내부를 라이의 “The Fall”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하우스파티장처럼 재현하겠다고 발표했다.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공연 기획사 페이크버진이 공개한 라이의 공연 실황 영상

공연은 정시가 살짝 넘은 시각에 시작됐다. 인트로가 나온 뒤 첫 곡 “Verse”가 흐르며 보컬인 밀로쉬가 등장했다. 밀로쉬가 특유의 쥐어 짜는 듯 매혹적인 첫 소절을 내뱉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라이는 데뷔 당시부터 고수하는 신비주의 컨셉 때문인지 타 밴드들에 비해 흐릿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 앞에 서있는 밀로쉬의 목소리야말로 라이를 라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였다. 그것도 첼로, 바이올린, 트롬본, 기타, 드럼 등 꽉찬 풀밴드 구성과 함께 말이다.

곧 이어 “3 days”, “The Fall”, “Last Dance” 등 히트곡들이 연주됐다. 가장 유명한 곡인 “The Fall”은 전주가 흐르자마자 함성이 터졌다. 절제된 그루브와 악기들의 하모니가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날 설치된 데코레이션 덕분인지 무대가 더욱 살아났다.

한니발은 키보드와 이펙터를 이용해 앨범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사운드를 들려줬으며 밀로쉬는 보컬뿐 아니라 드럼과 키보드까지 연주하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줘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세션들의 연주도 굉장했다. 특히 첼리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의 존재감은 아예 핵심 멤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현란한 그녀들의 즉흥 연주를 듣고 있자니. 흡사 레이첼스(Rachel’s)나 시규어로스(Sigur Rós), 혹은 스트링 연주에 몰입한 벨앤세바스찬(Belle & Sebastian)이 연상됐다. 라이하면 항상 따라 다니는 샤데이(Sade)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실력에 비해 아쉬웠던 공연

이날 연주된 라이의 곡들은 많은 편곡이 가해졌다. 음반은 정규 1집인 <Woman> 단 한 장 뿐이며 총 36분에 불과하다보니, 곡 전체를 아예 해체하고 재조립한 뒤 한층 확장된 구조에서 연주쪽에 집중한 듯 보였다. 드라마틱한 곡 구성과 볼거리는 늘었지만 공연이 뒤로 갈 수록 서사가 반복되면서 식상해진다는 단점도 함께 안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라이의 장점인 각각의 곡들이 가진 일관적인 정서와 간결함,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는 끈적거림이 라이브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완급조절이 되지 않은 공연 후반 때는 약간 지루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아, 또 왜 처지는 거 하는데”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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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의 공연 모습 (사진 출처= Yunho Jo Photography’s Facebook)

 

마지막 곡은 밀로쉬의 솔로곡인 “It’s Over”였다. 곡이 끝나가자 약속된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라이와 세션들은 연주를 멈추고 조용히 이별을 읊조리듯 노래했다. 노래 제목처럼 라이의 공연은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관객들은 5분여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앵콜을 외쳤다. 하지만 라이는 다시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라이가 무대를 퇴장하고부터 계속 이어지는 기묘한 배경음악은 앵콜을 예고하는 듯이 들렸음에도 말이다.
결국 모든 셋리스트가 연주되었음에도 예정된 80분이 채워지지 않았다. 불금을 맞아 기분 좋게 한잔 더 마시려고 했더니 술집에서 문 닫을 시간 되었다고 쫓아낼 때의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분명 라이의 공연은 좋았다.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긴 했지만 라이와 세션들의 연주는 정성과 성의로 넘치는 연주를 펼쳤기 때문이다.  다음 내한에서는 이번보다 꽉찬 셋리스트를 들고 왔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라이는 3월 25일부터 31일까지 싱가폴을 시작으로 서울, 타이페이, 도쿄, 홍콩을 거치는 5개국 5도시 아시아 투어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