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다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다

2008년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

여행의 끝자락이었다. 3주가 넘어가면서 여행이 노동처럼 다가오던 때였다. 곧 잊혀져버리고 마는 새로운 풍경이 좀 지겨워졌는지 모른다. 혹은 매일 이방인이 되어 낯선 도시를 부유하는 불편한 감정을 조금 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꿈에 그리던 프랑스 여행은 꿈처럼 달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니스에서 마르세이유로 향하던 길, 내 마음은 설렘보다는 휴식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다. 가까스로 찾은 호스텔에 짐을 풀어놓은 뒤 그저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러나 침대에 몸을 뉘인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도시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이틀뿐. 역시 이대로 잠을 청하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저녁시간이 다 된 탓에 출출함도 느껴졌다. 결국 요깃거리를 사면서 주변이나 좀 돌아볼 요량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호스텔을 나서자 그새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빗물로 흥건했다. 아직 차가운 3월의 바람은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었다. 왠지 모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언덕 너머로 보이던 항구에 가보기로 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빗물이 튀어 발목에 와닿았으나 조금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멀리 항구를 끼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한번 들이 쉬었다.

2008년 노을이 내린 프랑스 마르세이유

그때였다. 어디선가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들릴 듯 말듯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이 소리는 작은 참새 한 마리의 지저귐 같기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진원지에 가까울수록 소리는 커져왔다. 소리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멜로디가 되어 들려왔다. 꽤 유명한 샹송의 한 구절이었다. 아마도 에디트 피아프의 ‘장미빛 인생’이었으리라. 소리의 진원은 항구의 정 가운데 홈이 파인 작은 광장이었다. 광장 뒤로 서로 다른 모습과 표정을 한 배들이 고요히 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노래의 주인공은 바로 백발의 한 할머니.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그녀는 키가 아주 작았다. 하얗게 센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엔 곱게 화장을 했다. 그녀는 장난감처럼 생긴, 역시 작은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흥얼거리는 수준이었지만 그 어떤 가수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요정 같았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젊고 예쁜 모습은 아니었지만 요정이 있다면 딱 그녀와 같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마법처럼 그녀 뒤로 커다란 무지개가 떠올랐다.

눈앞에서 무지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지개는 그동안 스케치북 위에 힘주어 색칠하던 빨주노초파남보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은은한 빛을 품으며 무지개는 파스텔 톤으로 항구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요정 같은 백발의 그녀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지저귀고 있었다. 순간 고요히 정박해있는 배들이 무지개 조명 아래, 그녀의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괜스레 웃음이 났다.

마법도 잠시, 천국의 계단은 이내 사라졌고 해는 지평선을 향해 한껏 몸을 낮췄다. 태양의 키가 낮아진 만큼 바다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길고 짙은 항구의 그림자가 바다 위를 수놓았다. 그 사이 지저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법은 끝났다. 아, 마르세이유의 붉게 빛나던 항구에서 나는 요정을 만났던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 – 장미빛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