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 대한 단상

고양이에 대한 단상

고양이와 관련한 좋지 않은 기억이 하나 있다. 7살 즈음이었을까? 당시 우리 가족은 빨간 대문이 있는 좁은 골목집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집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는 것이 아닌가! 방문을 열어 보니 방바닥이며 침대며 옷장이며 할 것 없이 방 안이 온통 고양이 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동네 길고양이들이 이 사달을 낸 것으로 기억한다. 장난이라 하기엔 짓궂은 고양이의 침입은 ‘고양이는 반드시 복수한다’는 속설을 따른다면 언젠가 우리집 식구가 저지른 어떤 실수에 대한 보복임이 분명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날 이후 엄마는 며칠밤낮을 집안 청소에 매달렸고 아빠는 고양이라면 손사래를 치며 질색을 했다. 할머니 역시 고양이는 ‘영물’이라며 늘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런 탓에 내게 고양이는 무섭고 영특한, 좀처럼 좋아할 수 없는 동물이 되고 말았다. 물론 20년 가까이 개를 키우면서 고양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을 테지만.

고양이에 처음 호기심을 갖게 된 건 문학을 통해서였다. 개와 달리 고양이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독립적이며 복잡미묘하다. 고양이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점도 많다고 한다. 반려동물이라 하기엔 야생의 본능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탓이 아닐까. 토라진 애인의 마음처럼 미스터리한 고양이의 특성 때문에 고양이는 종종 ‘영감’의 대상이 되곤 한다.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소설에서도 고양이는 자주 기묘한 존재로 등장한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는 영혼의 피리를 만들기 위해 고양이의 영혼을 모으는 ‘조니워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살아 있는 고양이의 배를 갈라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을 꺼내 깨물어 먹던 장면은 잊히지 않는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고양이를 소재로 한 음악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넬의 정규 1집 <Let it Rain>에 실린 ‘고양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 타이틀곡인 ‘Stay’보다 이 곡을 더 좋아했었다. 이외에도 터보, 보아, 캐스커, 정재형, 김윤아, 체리필터 등 많은 뮤지션들이 고양이를 노래한 바 있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그려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랑과 애정, 분노와 질투, 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고양이는 어쩌면 사람과 가장 닮은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음악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 수가 많아진 만큼 실제로 일상에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주변에서 고양이를 키운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만 보더라도 고양이 사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고양이 사진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목격한 바에 따르면 고양이 애호가들은 일단 고양이의 외양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고양이 주인들에게 고양이를 왜 키우느냐고 물어보자 그들 중 대다수가 “예뻐서” “귀여우니까” 라는 비교적 단순한 대답을 내놓았다. 실제로 그들은 페이스북 등에 고양이의 다양한 모습을 찍어 올리며 말 그대로 고양이를 찬미하고 감탄한다. 일부는 고양이를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혹은 애인으로 여기기도 한다. “네가 여자 사람이었으면…” 하는 조금은 서글픈 바람과 함께.

 

이자해님의 고양이 ‘뭉치’

 

신한슬님의 고양이 ‘부장님’과 ‘실장님’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최근 농림수산식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집 고양이 수가 2010년 약 63만 마리에서 2012년 약 116만 마리로 2년 사이에 두 배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양이를 이토록 사랑하게 된 것일까? 매스컴의 영향도 적지 않을 테다. 서구 문화가 정착되어 가면서 고양이를 경외의 대상에서 친숙한 반려동물로 여기게 된 전통적 인식의 변화도 한몫 했을 수 있다. 혹은 우리의 성격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얼마 전 미국 위스콘신 주 캐럴 대학 심리학과 연구진이 재밌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대학생 600명을 대상으로 심리검사를 진행했는데 개를 키우는 사람은 더 활발하고 사회 규범을 더 잘 지키는 반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내향적이며 섬세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특히 고양이 주인들은 사회 규범을 지키기보다 편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고양이를 키우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할 테지만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고양이앓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켜본 바 고양이는 특별히 까다롭지 않고 24시간 내내 주인의 관심과 애정을 바라지도 않으며(오히려 귀찮아 한다!) 하루 종일 제 할 일을 하다가 적당한 때에 주인의 품에 돌아온다. 제 기분에 따라 같은 행동에도 매번 다르게 반응하는 탓에 속을 알 수 없고 밖에서 무엇을 하며 돌아다니는지도 의문이다.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조차 모호하다. 그래도 그 오묘한 눈빛과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최 미워할 수가 없다.


본질적으로는 점점 ‘쿨’해지는 인간 관계를 반영한 현상이라 볼 수도 있다. 상대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이제 너무 촌스러운 순애보가 되어버렸다. 적당히 애정을 주고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헤어지고. 그러다가 또 적당한 사람이 나타나면 적당히 만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에게 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필요도 없고 충성을 다짐할 의무도 없다. 쿨함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개를 키우는 것과 같은 온전한 ‘보살핌’은 힘에 부칠 뿐더러 두려운 것이다. 그런 탓에 100% 주인을 신뢰하는 개의 눈망울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고양이에게서 편안한 유대관계를 느끼는 게 아닐까?

개와의 진득한 관계에 익숙해져버린 내게 고양이는 여전히 어려운 반려동물이다. 그 도도한 몸짓으로 먼저 다가왔다가 손을 뻗으면 이내 휙 돌아서 버리는 고양이가 나는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주변에 늘어가는 고양이 애호가들 덕분에 고양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적어도 이제 내게 고양이는 집에 똥을 싸놓고 달아나버린, 피해야 할 영물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탐구의 대상이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