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고와 21세기 바리데기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를 때 먼저 떠오르는 심상은 무엇일까? 밝고 따뜻한 기억만은 아닐 것이다. 늦은밤 잠든 나를 끌어안던 아버지의 숨결에 섞여 있던 아릿한 술냄새, 거칠지만 애정이 깃든 손길, 가끔은 외로워 보이던 뒷모습.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느새 작아진 아버지의 어깨.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일 테다.

최근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고승덕 전 후보의 딸, 캔디고의 글을 보면서 문득 인순이의 노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식도 돌보지 못한 사람으로 교육감으로서 자질이 없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며 아버지의 공직 출마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캔디고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원문 일부 (사진 : 연합뉴스 참조)

가족사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나 캔디고에 따르면 고승덕은 이혼 후 자식들을 전혀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TV에 출연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대의 아버지상으로 추앙받는 모습을 보면서 캔디고가 느꼈을 분노나 원망의 깊이는 가늠할만 하다. 초반에 높은 지지율로 기대를 모았던 그가 ‘무책임한 아버지’ 란 의혹 속에서 낙마한 선거 결과를 보더라도 공직자의 도덕성 논란을 떠나 유권자 대다수가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최근 TV 프로그램 속에서 그려지는 아버지는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모자란 솜씨로 밥상을 차리는 ‘슈퍼맨’이 되었으나 현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권위적이고 무책임한 아버지상에 가까운 것 같다. 물론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철의 <훈민가>에 나오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라는 문구처럼 우리의 전통적 아버지는 ‘나를 낳아주신 분’일 뿐 ‘키워주신 분’은 아니었다. 결국 어린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건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일 터. 끝없이 밖을 향해 도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넋두리를 들으며 성장하는 동안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자연스레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으리라.

우리 전통 신화를 보더라도 아버지는 무책임한 가장으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예컨대, 바리데기는 우리 겨레가 섬겨 온 가장 중요한 저승 신 중 하나이지만 가족사를 들여다 봤을 때 그녀만큼 기구한 삶이 또 있을까 싶다.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지만 ‘원치 않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바다에 버려져야 했던 운명. 그녀를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였다. 성인이 된 바리데기의 삶은 또 어떠한가? 병든 아버지를 살릴 약을 구하기 위해 서천서역 저승 땅을 찾은 그녀는 ‘동수자’라는 남자를 만나 혼인한다. 하지만 그마저 어린 세 아들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멀리 떠나버린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그녀의 삶에 있었던 두 남자 모두 자신이 낳은 자식마저 버리는 매정한 아버지였다.

홍성담 作

신화 속 매정한 아버지상은 어쩌면 ‘침략의 역사’ 속에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후레자식’이 되어버린 수많은 민중을 위로하기 위한 신화적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이 신화 속 무책임한 아버지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는 ‘아동수출국’이라는 불명예는 벗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 입양된 아이들의 수를 따져 봐도 중국, 에티오피아, 러시아의 뒤를 이어 한국이 4위에 올랐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바리데기들이 바다를 건너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바리데기의 남편 동수자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취한 뒤 멀리 떠나버리는 아버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필리핀에서는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가리키는 ‘코피노’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단체에 의하면 그 수만 해도 현재 3만 명을 넘어섰다고. 그들 대부분은 성매매를 통해 ‘사고’로 생기거나, 가정을 꾸려 ‘의도적’으로 탄생한 아이들이다. 우리 신화에 나타나는 무책임한 아버지상이 국내를 넘어 동남아까지 뻗어 나가고 있다니 어쩌면 우리 신화는 한편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의 아버지는 달라졌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육아’의 책무도 남성에게 요구되는 시대다. 하지만 여전히 딸의 고백에 표심이 흔들리고, 인순이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쏟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아버지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슈퍼맨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너무 뻔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필요하다. 가슴 속에 담아둔 하지 못했던 그 말들을 건넬 수 있는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때론 미워했다고, 그리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어릴 적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산이었습니다

지금 제 앞에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느새 야트막한 둔덕이 되었습니다

부디 사랑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하지 마십시오

한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는지
눈물이 말해 준다

점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점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제발 내 얘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도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희진킴

편집장. 음악과 사람, 공연에 대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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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1. 오나리자말하길

    정말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2. 굼뱅이말하길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달라진것보다는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태도가 더 달라진거 같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를 응징하는 캔디고와 은혜로 갚는 바리데기!
    캔디고의 글이 민심을 돌려놓았다는 기사를 보면서 한편 서글프기도 합니다.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지만 자식인 나는어디쯤 서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3. 굼뱅이말하길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달라진것보다는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태도가 더 달라진거 같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를 응징하는 캔디고와 은혜로 갚는 바리데기!
    캔디고의 글이 민심을 돌려놓았다는 기사를 보면서 한편 서글프기도 합니다.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지만 자식인 나는어디쯤 서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희진킴말하길

      무책임한 아버지를 응징하는 캔디고와 은혜로 갚는 바리데기! 달라진 자식의 태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 자식의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지도 사뭇 궁금해집니다. 귀중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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