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무라카미 하루키와 재즈가 만났을 때

 

“돌이켜보면, 책과 음악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열쇠였다.”

“나는 글 쓰는 법을 음악의 리듬에서 배웠다”

-무라카미 하루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당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무라카미 하루키일 것이다.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 상심에 빠져 있던 내게 엄마가 건네 준 책이 “상실의 시대”였고 이후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주 오랫동안 하루키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당시 인생의 목표 중 하나가 ‘하루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지금도 그의 신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챙겨보긴 하지만 과거 하루키의 세계가 내게 주었던 영감이나 위안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수준으로 유효한 것 같지는 않다. 소설 속 현실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이나 정의할 수 없는 관계의 무상함이 어쩌면 나의 일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탓이리라. 혹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감수성과 상상력이 무뎌진 때문일까.

그럼에도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하루키의 취향은 그의 글쓰기 속에서 꽤나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몇 권의 소설만 읽더라도 그가 클래식과 재즈, 팝을 비롯해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하루키가 만든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와 기묘한 상황 속에서 듣는 음악은 새로운 의미로 들려오기 마련이다. 하루키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특별한 의미 없이 존재하던 음악과 새로이 관계맺음을 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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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하루키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 있는 작가일뿐더러, 하루키 작품 속 음악을 분석하는 책이라든지 이를 활용한 공연도 상품화되곤 한다. 지난 17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펼쳐진 클래식 재즈 공연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클래식 음악, 재즈, 그리고 비틀즈’ 역시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음악‧문예 비평가인 고누마 준이치 와세다대 교수가 기획한 이번 콘서트는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과 구절을 라이브로 선보이는 무대였다. 흥겨운 재즈로 꾸려진 1부와 다소 클래시컬한 음악에 초점을 맞춘 2부로 나뉘어졌다. 연주에는 일본의 재즈 트리오 ‘고쿠부 히로코 스페셜 트리오’와 역시 일본 출신의 여성 콰르텟 ‘1966 콰르텟’, 국내 피아니스트 조재혁이 함께 했다.

공연은 뮤지션이 연주를 하기 전 연극배우가 등장해 소설 속 문장을 읽으면 그에 해당되는 곡이 흘러나오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17일에는 배우 김소희가, 18일에는 연극계의 대모 손숙이 각각 낭독했다. 개인적으로는 김소희의 낭독이 콘서트의 컨셉과는 더 잘 어울리는 듯했다.

비틀즈와 하루키 

잘 알려진 것처럼 하루키 소설 속에는 비틀즈의 음악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하루키 스스로가 “자신은 딱히 비틀즈의 팬이 아니다”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긴 했지만 역시 하루키 소설 속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비틀즈의 음악은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그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에서 비틀즈의 1965년 앨범에 실린 “노르웨이의 숲”은 마치 주제곡 마냥 책장을 넘긴 뒤에도 귓가에 서성인다. 실제로 이 소설은 그가 비틀즈의 노래들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노르웨이의 숲”과 역시 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1973년의 핀볼>에 나오는 “페니레인” 등 비틀즈의 곡들을 그루브 넘치는 재즈 형태로 해석했다.

 

노르웨이의 숲 – 비틀즈 ( 상실의 시대 中 )

“<노르웨이의 숲>을 부탁해”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씨가 부엌에서 고양이 모양의 저금통을 들고 오자, 나오코가 지갑에서 100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거기에 넣었다.

“뭐죠, 그건?”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땐 여기에 100엔씩 넣게 되어 있어.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그렇게 정했어. 정성을 담아 신청하는 거야.”

고쿠부 히로코 트리오, 하루키를 연주하다

이날 무대에서 단연 돋보였던 것은 고쿠부 히로코 스페셜 트리오였다. 피아니스트 고쿠부 히로코를 중심으로 야히로 요이치(베이스)와 이와세 탓삐(드럼,퍼커션)으로 구성된 밴드는 하루키 음악에 등장하는 팝, 클래식, 재즈 등 장르를 막론하고 자신들만의 신나고도 유쾌한 버전으로 재구성했다.

밴드 전체를 리드하며 팔꿈치로 건반을 치는 등 온몸으로 피아노와 호흡하던 고쿠부 히로코의 연주도 신명났지만 특히 베이스를 치는 야히로 요이치의 연주에 눈과 마음이 흘렀다. 일본인 같지 않은 리듬을 연주하는 베이시스트로 불리는 그는 10대 시절을 스페인에서 보내는 등 라틴음악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쿠부의 사운드를 지탱하는 것은 물론 몸 전체로 표현하는 압도적 리듬감은 그야말로 감탄스러웠다.

Curtis Fuller – ‘Five Spot After Dark’ (어둠의 저편 中)

 “중학생 때 우연히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블루스-에트>라는 재즈 레코드를 샀었어. 아주 오래된 LP였지. 왜 그런 걸 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난 그때까지 한 번도 재즈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말야. 아무튼 A면의 첫 곡으로 “파이브 스팟 애프터 다크”라는 연주곡이 들어 있었는데, 그 곡이 너무 너무 좋아서 엄청 감동을 받았어. 커티스 풀러가 트롬본을 불었던 곡인데, 처음 들었을 때 뭔가 확 트이는 듯한 느낌이었어. 아무튼 별안간 가려진 두 눈이 확 트일 만큼 무척 감동을 받았으니까. 그때 트롬본이야말로 내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지. 나하고 트롬본.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어둠의 저편>에 등장하는 커티스 풀러의 “Five spot after dark”를 베이스 독주로 연주했는데, 무릎을 꿇은 채 공간 속에 멜로디를 입혀가는 모습은 그 풍경만으로도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밖에도 트리오는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존 콜트레인의 “My Favourite Things”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등장하는 영국의 포크송 “대니보이”를 편곡해 들려주기도 했다.

사실 일부 재즈 페스티벌을 제외하고 일본의 재즈 뮤지션들을 집중해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고쿠부 히로코 트리오에게서는 국내 재즈 아티스트들과는 다른  특유성이 느껴졌다. 어쩌면 과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본인들만의 친절함이랄까. 화려한 연주실력을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연주 형태나 무대 매너 역시 결코 익숙한 성질의 것들은 아니었다.

고쿠부 히로코 스페셜 트리오

인터미션을 포함해 약 2시간 가량 진행된 공연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다만 공연장이 클래식 전용 공간인만큼 재즈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공연 중간중간마다 연주자의 흥이 달아 오를 때마다 함께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고,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고쿠부 히로코의 적극적인 손짓에도 침묵하는 관객들 중 한 명이 되어야 했다. 알록달록한 조명 연출 일색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가장 주목 받는 작가의 세계를 음악을 통해, 특히 일본 재즈를 빌어 느껴본다는 것은 하루키의 소설처럼 기묘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폈을 때 나도 모르게 먼저 소설 속 음악이 떠오를지도.

 

 

희진킴

편집장. 음악과 사람, 공연에 대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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