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모국어,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한국말'

슬픈 모국어,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한국말’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한국말’ 듣기

외국어를 술술 할 수 있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해서, 개인과 개인의 마음이 쉽게 통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막힘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을수록 절망감이 더 심해질 수 있고 더듬거리며 대화를 나눌 때야말로 마음이 더 잘 통하는 경우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 중

대학 시절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적이 있다. 당시 나를 가장 좌절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영국인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 자리였다.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나는 도통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귀를 기울이고 접시 위로 흩어지는 익숙한 단어들을 주워 담으려다가 이내 포기한 채 밥을 먹는 데만 집중하곤 했다.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대화에 끼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나는 꽤 적극적으로 영어를 배웠다. 이제 식사 자리에서도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출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외국어로 떠든다는 것은 여전히 꽤 피로한 일이다. 또 언어 실력이 나아졌다고 해서 그들과 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식사시간에 오가는 대화 대부분은 한 귀에 웃고 흘려 보내는 잡담에 가까웠고 이해는 하지만 가슴이 더욱 답답해지는 새로운 국면에 놓이게 됐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던 브라질 친구와 더듬거리며 나누던 대화에서 진정한 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외국어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상에서 나는 분명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듯한 절망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언론에서도 불통으로 점철된 답답한 대화를 너무도 자주 목격한다. 외국어를 배우며 우리는 수없이 좌절하지만 실상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에 더 큰 슬픔과 절망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기가 막힌 테크닉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명확하게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하루키의 말처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배워야 하는 건 꼭 언어만은 아닐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