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나를 사로잡을 때

비극이란 때로 예술가에게 ‘묘약’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곤 한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듣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다 간 베토벤의 음악에서 더 큰 감동을 느끼듯, 평생 천재화가로 불리며 영예를 누린 피카소보다는 정신착란과 가난 속에 시달리던 고흐의 그림 앞에서 발을 뗄 수 없듯이. 물론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취향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 발현된 예술 작품은 더욱 강렬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다.

멜로디 가르도의 음악이 주는 인상 역시 이와 비슷하다. 보사노바의 경쾌한 리듬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떠돈다. 실제로 그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을 감내해왔다. 2003년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중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지프 차에 치어 뇌와 척추, 골반 등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 당시 후유증이 심각해 신경 손상으로 약한 빛과 작은 소리에도 기절을 할 만큼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단기기억상실증 탓에 방금 한 일도 제대로 기억할 수 조차 없었다고.

그녀를 살린 건 음악이었다. 병상에서 그녀는 기타를 들고 곡을 쓰기 시작했고 비극과 고통은 가장 강력한 영감이 되어주었다. 사연 깊은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비운의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떠올린 건 우연만은 아닐 테다. 프리다 칼로 역시 18세에 끔찍한 교통사고로 쇠파이프가 몸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이 불행은 그녀를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삶이 힘들 때면 멜로디 가르도의 음악이 작은 위로가 되곤 한다. 그녀의 불행 앞에 나의 불행을 비교하며 위안을 삼는다기보다는 삶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들의 담대함에 감화된다 해야 할까.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는 예술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때론 나의 불행을 감추거나 괜찮은 척 하는 대신 이를 인정하고 새로운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 편이 좀 더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

프리다 칼로 <부러진 척추> 1944

So we meet again my heartache
So we meet again my friend
I should’ve known that you’d return
The moment I was on the mend

So we meet again my heartache
Like two lovers torn apart
Bound together by the breaking
Of a tired and torrid heart

So we meet again my heartache
Just as leaves begin to change
How you’ve made my life a story
Filled with whirls you’ve rearranged

So we meet again my heartache
Come and join me in my pain
You’re the reason I remember
Every sweet and sad charade

So we meet again my heartache
Come and sit with me a while
Rest your head upon my shoulder
Hide your face beneath my smile

So we meet again my heartache
Hold the glasses stilled with wine
I hope you join me in my toast, my ghoulish host
And maybe stay a while this time

 

 

희진킴

편집장. 음악과 사람, 공연에 대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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